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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위버는 프랭크 드로잔이 그의 한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그의 이발소 문을 열던 순간을 기억한다. "한살짜리인데, 손발이 매우 컸어요.첫 눈에 농구선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었죠."

20년 후, 더마 드로잔은 그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컴튼의 울타리 쳐진 작은 집을 떠나서, 에어 캐나다 센터 근처의 고층 건물에 살고 있다. 그의 오른 손목에는 할머니가 지어준 별명인 "축복받은 아이"가, 왼쪽 손목에는 그의 어머니의 이름인 "다이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의 손등에는 그가 어렸을 때 부터 항상 지켜왔던 신조인 "충성심"이 새겨져 있다.

비록 고향을 떠났지만, 드로잔은 컴튼의 자랑이자 가장 사랑받는 스타 중의 한 명이다. 빨간 옷을 입고 다른 갱단의 구역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도 살해당할 가능성이 높은 이 동네에서조차, 드로잔의 얼굴이 들어간 토론토 랩터스의 붉은색/검은색 포스터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축복받은 아이


더마 드로잔은 1989년 8월 7일에 로스앤젤레스 남쪽의 컴튼에서 태어났다. 더마는 자궁 근종으로 인해 더 이상 임신이 불가능할 줄 알았던 그의 어머니에게 기적처럼 찾아온 아이였고, 그의 가족에게는 축복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20살에 랩 테이프를 가지고 친구와 싸우다 총에 맞아 숨진 그녀의 오빠 "르마"의 이름을 따서 그를 "더마"라고 이름지었다.

더마는 여느 컴튼의 평범한 아이들과 같이, 항상 부모님의 세심한 주의 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진기사였던 그의 아버지가 출근 전에 학교에 데려다 주면, 퇴근 후에는 공장에서 일을 마친 그의 어머니가 항상 창피해하는 어린 더마를 집에 데리고 왔다. 

그의 집은 경찰서에서 불과 한 블록 거리였지만, 드로잔 가족은 항상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더마 드로잔이 4살때, 우체국에서 일하던 또 다른 외삼촌 케빈이 그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한 갱스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충성심


자신의 6'4짜리 아버지 위로 덩크를 할 수 있다는 12살짜리 아이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주변에 퍼져 나갔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드로잔에게 수 많은 고등학교들이 관심을 보였고, 그 중에는 전국대회 챔피언이자 브랜든 제닝스를 데리고 있던 도밍게즈 고등학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드로잔은 그의 집 근처에 있는 무명의 컴튼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같이 컴튼 고등학교를 위대하게 만들어 봅시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시즌에 평균 26점을 기록했고, 컴튼 고등학교를 수십년만에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드로잔은 또래에 비해 훨씬 큰 키를 이용해서 손쉽게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지역 주민들은 주말 코미디 프로그램의 꺽다리 캐릭터의 이름을 따서 그를 "디보"라고 불렀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자신들의 자랑으로 여겼고, 심지어 그 지역의 갱단마저 "디보"와 그의 가족은 건드리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다. 그의 아버지 프랭크는 경기 후에 드로잔을 데리고 집에 가다가 총을 든 강도를 만났을 때, 강도의 동료가 이렇게 소리쳤던 것을 기억한다. "멍청아, 저건 디보랑 걔네 아빠잖아!"



다이앤


더마 드로잔이 고등학교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갈 때, 그의 가족에게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그의 어머니 다이앤은 손에 나기 시작한 종기와 원인 모를 피로감 때문에 병원에 찾아갔고, 1년여의 진찰 끝에 루푸스병이라는 희귀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루푸스 병은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기는 만성 질환이고, 관절염에서부터 신장병까지 다양한 증상을 가져오는 난치병이다.

그녀는 곧 공장일을 그만두었고, 결국 지팡이를 짚지 않고는 걷기 힘들게 되었다. 더마 드로잔이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고 전국 올스타에 선정되었을 때, 그의 가족을 혼자 지탱한 것은 그의 아버지 프랭크였다. 시청에 소속된 사진기사였던 프랭크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각종 결혼식, 장례식, 심지어 돈만 제대로 쳐준다면 게이 스트립쇼의 사진기사 역할까지 가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아들에게 제시되었던 각종 불법 계약들을 모두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이 부서지더라도 아들을 돈으로 팔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마 드로잔은 부모님의 집에서 20분거리에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이하 USC)에 진학했고, 대학 캠퍼스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드로잔은 더 이상 가장 크고 운동능력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고, 그냥 림으로 돌격하면 손쉽게 득점하던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보다 평균득점이 15점이나 하락했고, 사람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어떠한 비난도 그가 매일 밤 체육관에서 연습하는 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드로잔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새벽까지 그의 새로운 무기인 미드레인지 점프슛을 연습했고, 마침내 USC를 Pac-10 토너먼트 우승으로 이끌면서 대회 MVP를 받았다. 그 바로 다음 해에 더마 드로잔은 그의 어머니를 위해 NBA 드래프트에 지원했고, 비록 NCAA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그가 기존에 보여준 모습만으로도 전체 9픽으로 토론토 랩터스의 지명을 받는 데에는 충분했다.


프랭크


NBA에 입성한 드로잔이 가장 먼저 산 것은 검정색 캐딜락과, 그의 가족이 살게 될 캘리포니아의 마당이 딸린 집이었다. 드로잔 가족은 새 집에서의 첫 6개월동안 갑자기 달라진 환경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 지 난감해했다. 새로운 동네는 하루종일 조용했고, 경찰 헬리콥터도, 총격전도, 사이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옆집에는 은퇴한 의사가 살았고, 동네에는 갱단 대신 운동복을 입고 파워워킹을 하는 아줌마들밖에 없었다.

프랭크 드로잔은 그의 아들을 그리워 하지만, 아들이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있기도 하다. 프랭크는 아들의 유명세를 누리려고 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더 경계하게 되었다. 최근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경기 티켓이나, 돈을 빌리려는 사람들이었다. 프랭크는 더마의 요청에 따라 그의 돈을 관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고향인 컴튼 고등학교에 새 체육관을 짓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프랭크는 아직도 가끔 차를 타고 30분이 걸리는 고향 컴튼에 가서 사진기사 일을 맡는다. "저는 예전과 변한 것이 없습니다. 제 아들이 저를 강제로 은퇴시켰지만(웃음), 저는 아직도 사진기사 프랭크 드로잔입니다."




컴튼에서 NBA로


변하지 않은 것은 더마 드로잔도 마찬가지다. 그는 시즌 중에는 캐나다에 살지만 여름에는 항상 고향인 LA로 돌아와 고향 친구인 제임스 하든, 팀원 조나스 발렌슈나스, 그리고 적팀 선수들인 트레버 아리자, 조던 클락슨, 빅터 올라디포, 줄리어스 랜들 같은 선수들과 함께 체육관에서 땀을 흘린다.

"저는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항상 잊지 않습니다." 드로잔이 말한다. "고향에 가면 어렸을 때의 저와 똑같은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 아이들은 저를 보고, '당신도 여기서 태어나서 성공했으니까, 저도 할 수 있어요.' 라고 이야기하죠. 그런 아이들 중에는 이미 저와 같은 팀에서 뛰는 딜론 라이트나 노먼 포웰같은 친구들도 있죠. 이 친구들을 보면 기분이 좋지만, 제 자신이 굉장히 늙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웃음)"

"어린 친구들은 저를 우러러보지만, 우리는 결코 '우리 세대에서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가' 같은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자기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드로잔이 이야기한다. "아마 우리 모두 늙어서 흔들의자에라도 앉게 되면, 그런 얘기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웃음)"